세잔_Cezanne의 영향
풍경을 그리는 것은, 다시 말해 인간의 존재에 대한 어떤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는 풍경인 산을 예로 들어 보자면, 시간의 잠식 에서부터 벗어나야 할 것 같은 것들에 대해 시선을 두는 것이다. 풍경은 시간적 요소를 알려주는 장치가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아주 긴 시간의 지속을 보여주는데 너무 긴 나머지 한 인간의 삶 혹은 인간 자체의 존재의 시간을 훌쩍 넘어버리기도 한다. 풍경을 바라보는 것, 이것은 항상 과거의 것을 바라보기 보다는 인간이 있기 전에 존재할 수도 있었을 세상에 시선을 던지는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산이 어떻게 생성되는지에 대해 무지했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어떤 과정들이 이 수수께끼로 가득한 존재들을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세잔은 그의 생 빅투와르Sainte Victoire 산 역작들을 통해, 상상력과 회화로서 이 지하의 생성과정에 대한 미스터리를 보다 깊이 파고들고자 했던 화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세잔은 산은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이며, 이 생성 과정이 우주의 발산하는 힘과 여전히 지구의 중심에서 포효하는 마그마의 들끓는 힘 사이의 작용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권순철 작가도 한 작가는 자기 자신과 세상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풍파에 맞서 있다 보면, 그는 그를 파멸로 이끄는 감정을 맞닥뜨릴 위험이 있다. 이 감정이 일시적이고 타동적인 것이라고 해도, 이 파괴적인 감정은 또한 모든 창조의 과정의 요인이 된다. 이 때문에, 이 감정을 길들이고자 해야 한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그것은 찰나적 지상의 풍경을 땅과 우주의 무한한 시간과 이어내기 위해서 인간이 찾아낸 방법들 중 하나이다.
조아킴 가스케Joaquim Gsquet의 “세잔과의 대화”의 평론에서 보듯이, 화가가 세계와 공명을 일으키는 순간과 이잠재적 융합에 동의하며 또 이에 대항하며 위험하고도 특이한 대립구도로부터 활기차고 빛나게 예술을 구성해나가는 방법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할 수 있는 화가는 세잔 밖에 없을 것이다.
“풍경을 잘 그리기 위해서, 나는 먼저 지층을 찾아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세계의 역사는 두 개의 원자가 만나고 결합하고 두 개의 소용돌이가, 두 개체의 화학적 혼합이 이루어진 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거대한 무지개들, 이 우주의 프리즘, 무無위에 우리 자신들 위로 펼쳐진 새벽, 나는 이것들이 상승 하는 것을 봐요. / 이 순간 내 작품을 할 수는 없죠. 우리는 무지갯빛의 카오스입니다/ 태양은 소리 없이 나를 관통해요, 나의 권태를 위로하고 풍요롭게 해주는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요. 우리는 이렇게 태어나죠. 밤이 다시 찾아올 때, 난 그림을 그릴 것이고, 그 전엔 전혀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다음날, 이른 아침, 천천히 지형의 토대가 나에게 나타납니다. 지층들이 쌓여가고, 내 화폭의 굵직한 구도들, 마음속으로 석질의 구조들을 그려보죠. 물 아래로 바위들이 생겨나고 하늘이 자리잡는 것이 보입니다. 모든 것이 수직으로 떨어져요. 희미한 움직임은 이 선으로 이어지는 풍경을 둘러 싸죠. 붉은 땅은 심연에서부터 태어나고 / 조물주는 이 균형을 이루기 위해 이 상승을 잠시 멈추게 할겁니다. 그가 앞으로 해 나갈 것들을 암시하면서요. 나는 이 생각을 계속해서 고집하고 싶어요, 이 감정의 줄기를 이 우주적 화염의 위로 연기 속에 둘러 쌓여 있는 듯한 이 느낌을 계속해서 표현 하고 싶어요.”
<세잔과의 대화, Conversations avec Cezanne, Ed Macula>
권순철의 풍경들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그가 세잔의 땅에 대한 이해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을까, 또한 그 역시 인간에게 땅 그 자체에서 인간의 힘의 원칙을 찾게 하는 질문들을 쫒아간다. 그는 모든 산이 하나의 건물이며 산에는 그를 지탱하게 하는 골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꽤나 그럴 듯한 환상이다(세잔도 이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권순철이 알다 시피, 모든 그림의 목적성은 그림 자체가 가지고 있으며 작가는 그의 터치를 통해서 이 창조의 수수께끼에 우리를 더 다가서게 한다.
대성당과 얼굴
권순철의 작품의 힘은 다른 모든 작가들도 아는 것들에서 비롯된다. 살갗과 육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얼굴을 그가 산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비할 바 없는 소묘 화가인 그는 절대로 그 둘간의 유사함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보통 얼굴에 관한 한 숨기려고 하는 힘과 운동성을 시사하는 것을 그의 붓이 찾아내도록 하는 그 유사함을 찾고자 한다.
아마도 이 때문에 그가 나이 많은 사람들과 인생의 애환을 많이 담고 있는 사람들을 그리는 것이리라. 왜냐하면, 다른 어떤 유형의 얼굴도 인생과 시간이 인간의 살갗에 만들어내는 폭력을 드러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 얼굴 자체가 아니다. 권순철이 그린 모든 얼굴은 누군가의 얼굴, 그가 알거나 혹은 만났던 아니면 여기저기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 누군가의 얼굴이다. 그얼굴을 그리면서, 그는 인물의 정체성을 앗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회화적으로 힘있는 표현법을 터득한 그는 한 인간의 바닥에 존재하는 마그마와 같은 정체성을 끌어 낸다. 인간에게도 산들과 마찬가지로 혼돈의 힘과 어두운 용암 그리고 불모지들이 동요하며 진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단순한 이목구비가 권순철의 터치 아래 머리가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머리가 항상 신체와 연결되지 않은 체 보여지는데 육체를 만드는 모든 것들을 얼굴에 올라오게 하여 하나의 오롯한 행성처럼, 그 존재로 완벽하게 대성당처럼 존재하게 하는 듯 하다.
권순철이 마침내 도달한 것은 각 개인이 자신에게 예수의 고통의 얼굴과 같이 그 고유한 얼굴의 흔적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 상징적인 인물을 그려낼 때, 드문 힘을 가진 채 모든 종교적 독단주의를 넘어서서 예수를 그리는 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모든 문맥에서 벗어나서 각각의 표정은, 머리는 하나의 섬이며 하나의 대륙, 고통에 찬 거대한 은신처, 사실과는 거리가 먼 동굴과 같아서, 이곳에 인류의 모든 드라마가 집약된 듯 하다.
다른 많은 곳들과 유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절대적으로 유일한 장소로 존재의 고통과 삶의 필연성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교회, 대성당이란 무엇인가? 대성당의 의미와 비교되는 이 인간의 보다 깊은 존재의 의미는 권순철이 그의 일생 동안 그려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수십 개의 커다란 데생을 먹과 함께 놓을 때,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분명한 오랜 시대의 작업을 보여주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최근의 역사에 관한 작업을 보여주는 데에도 있다. 최근의 역사가 개인의 이목구비들에 새겨지는 방식 그리고 특히나 이 역사의 모든 폭력들을 넘어서서 개인의 개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각자의 고유한 형태들로의 해체되는 가운데 개체가 저항하는 방식을 보여주고자 했다.
권순철이 다른 어떤 작가들 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모순이다. 삶을 파괴의 힘 그리고 삶 속에서 매일을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 그로 하여금 매일을 만족스럽도록 하는 이 힘 사이의 무한한 간격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뼈, 넋
그가 지칠 줄 모르는 살갗에 대한, 인간의 또 토지의 살갗에 대한 작업을 통해 이해하고 확인하고자 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각각 고유한 힘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른다 해도, 분명 그 자신에게 존재하는 것이며 이 힘이 삶을 지탱하고 있다.
권순철의 가장 추상적인 작품들은 대체로 ‘넋’이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두고 있는데, 이 ‘넋’은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참조해야 할 어떤 추상의 원칙이나 비물질적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라는 육신 속의 뼈대로서 나타나는데, 이것은 권순철의 회화 속에서 주요 메시지가 된다.
권순철이 그린 것이 바로 시간이기에 시간을 그릴 수 있다고 가장한다면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살갗이 우리를 구성하고 우리는 이 속에 살아가며 이로서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이 곧 그의 작품의 주제가 된다. 어찌 되었든 이‘넋’을 제목으로 삼고 있는 그림들이 표현하고자 한 것은 그림자처럼 살아 있는 것에 깃드는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이 보이지 않는 흐름, 곧 시간 속의 뼈와 같은 존재 일 것이다. 이 긴말한 내면의 저항을 시도하면서 비로소 시간이 지각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시간이 우리 각자에게 부여한 창조의 시점이 되는 진흙에서부터 우리는 만들어 졌다. 권순철은 이 시간에 대한 저항의 힘이 시간을 볼 수 있게 혹은 적어도 시간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근본적 가설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 힘은 하나의 소재처럼, 잠정적인 것처럼, 저항처럼 또한 하나의 흐름처럼 보일 뿐이다. 그 속에 아무것도 볼 것이 없는, 얼굴도 산도 없는 이 그림들은 사실 권순철이 현실에서도 그림에서도 얼굴과 산, 둘 중에 하나를 지탱하고 있는 그 근본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게 한다.
이 것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이나 루시안 프로이트Lucian Freud 가 추구했던 것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대한 시각화, 존재를 분명 인식하고 있지만 우리가 그 것에 내줘야 하는 자리를 거부하는 현실, 즉‘넋’의 존재성에 대한 형상화를 통해 살갗의 실체를 보여주고자 하는 그림들로서 위 두 사람과 생각을 같이한다.
‘넋’이란 무엇인가? 살갗 밑에서 그것 들의 해체를 견뎌내는 것, 시간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현실이고 영원히 지각할 수 없는 두 개의 상반되는 물결이 마주치는 곳이다. 권순철의 작품의 힘은 바로 이 살아있는 것으로부터 올라오는 물결과 역류하는 시간의 물결들의 만남의 순간의 존재를 시각화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에 있다.
이 그림들은 보통 극도로 추상적이지만 그것을 주의 깊게 바라보면 우리는 살갗이 낯선 것이 아니며 작품 속에서 또 인생에서 이것이 와해되는 힘을 극복해 내는 것에 대한 희망은 인생과 대조를 이루며 좌절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 그림 앞에서, 우리는 외젠 르루와Eugene Leroy와 함께 그의 인질 시리즈 속에서 인생과 사람들의 내면의 긴장감을 표현할 줄 알고 있었던 포트리에Fautrier를 떠올리곤 한다.
이 추상적인 이미지들, 그러나 넋에게 유효한 물질적 의미를 정확하게 부여하고 있는 이 이미지들 속의 지속적인 폭력성을 넘어서, 권순철은 우리에게 개방된 영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는 그의 철학의 상당 부분을 불교와 나누며 기독교에서는 인도애를 차용한다. 그는 우리가 이 넋에 다가가는 것은 바로 상처를 통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한국인들도 그들이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그들을 떼어놓고 또 다시 연결 짓는 영혼의 형태이며 그들의 살갗의 상흔이기도 한 풍경 속에서 상처들을 떠올릴 때 그 넋에 다가서게 된다.
Les montagnes ont des os. Une telle déclaration seul un peintre peut la faire, car seul un peintre voit ce qui s’agite vit et vibre sous les roches, sous la terre. Seul un peintre porte le regard non pas au-delà de l’horizon mais à l’intérieur de la terre, là où la vie s’engendre, croît, se construit, émerge, forme de hasard répondant pourtant avecune impatience contenue à un appel présent du ciel, du soleil. Car, contrairement à ce que nous croyons, cela a lieu encore au présent, cette vibration sourde qui fait la montagne se lever, les volcans cracher laves et cendres, les montagnes soudain se fendre et s’écrouler et plus loin, ailleurs, d’autres montagnes naître.
Il est vrai que la conscience de ce phénoméne est plus aigue lorsque l’on vit dans des contrées où l’activité tectonique est importante, mais aussi dans des pays où certaines montagnes sont dotées d’un caractére sacré, comme c’est le cas en Corée.
Seul un peintre voit aussi que la chair, par quoi hommes et animaux sont semblables, est agitée de soubresauts qui restent invisibles à un oeil profane. Ce qui fait trembler cette chair, c’est bien sur la vie, mais c’est aussi le temps et à travers lui l’histoire. Et l’histoire est le seul moyen qu’ont trouvé les hommes, et la ils se séparent des animaux, pour mesurer leur existence à l’aune de leurs angoisses. Mais la chair n’est pas uniforme. Ou plus exactement elle prend forme dans ce qui définit le plus l’individualité de chacun, les traits de son visage. si le corps peut subir les outrages du temps, ce sont les visages qui semblent destinés à porter les traces des événements vécus. On pourrait même dire que c’est pour cela qu’ils existent, pour parler et chanter mais surtout pour crier, pour émettre des signes mais surtout pour que trouvent à s’imprimer les signes inconcevables par quoi la vie individuelle apprend à savoir we qu’elle est.
Ainsi un visage est-il à la fois un paysage à l’égal d’une contrée peuplée de ravines, de chemins creux et de sentiers incertains et le lieu de la manifestation de ce qui fait l’homme, le fait qu’il pense, qu’il le sait et qu’il peut par la pensee, s’eloigner de ce qu’il vit au point de se voir comme s’il habitait au ciel. L’homme sait alors que quelque chose le détermine qui résiste à tout, semble indestructible et qu’il ne sait pourtant pas localise sinon dans les traits de sa face. Il appelle âme cet os qui le fait tenir et que pourtant jamais il ne réussit à saisir.
Montagne, chair, visage et âme, nous venons de pénétrer dans um univers pictural dont la grandeur vient de cette capacité de faire exister cette intrication à la fois subtile et indéchirable entre ces strates de vie et de pensée que l’on croit, à tort, hétérogènes alors qu’elles sont de même nature, C’est ce que nous dit la peinture, la grande peinture, celle de KWUN SUN-CHEOL.
1 La leçon de Cézanne.
Peindre des paysages, c’est toujours porter un regard sur quelque chose qui, si l’on s’en tient aux montagnes par exemple, c’est-à-dire à des paysages dans lesquels aucune trace de la presenece humaine n’est visible, semble devoir échapper aux ravages du temps. Enfait le paysage est un indicateur temporel qui nous renvoie à la trés longue durée, si longue qu’elle dépasse et de loin celle la vie humaine voire celle de l’existence même de l’homme. Regarder un paysage, c’est toujours regarder non pas tant dans le passé, que plonger le regard dans le monde tel qu’il pouvair exister avant que l’homme n’apparaisse sur terre.
Longtemps on a pu ignorer comment étaient apparues les montagnes, mais il n’était pas compliqué de deviner que quelque chose d’incommensurable se jouait autour de ces présences énigmatiques.
Cézanne et 《sa》 Sainte-Victoire est le peintre qui a le plus profondément tenter de pénétrer par l’imagination et par la peinture ce mystére des genéses chtoniennes. C’est lui qui a compris en tout cas qu’une montagne est un être vivant don’t l’engendrement résulte d’une action concertée entre les puissance irradiantes du cosmos et les puissances bouillonnantes de magma qui rugit encore au centre de la terre.
L’artiste, KWUN SUN-CHEOL le sait, est celui qui se tient au carrefour entre moi et monde. En se tenant là contre vent et marees, il prend la risque de voir l’émotion l’entraîner à sa perte. Si l’émotion est transitoire et transitive, elle est aussi le ferment de toute creation. Il faut pour cela tenter de l’apprivoiser. Peindre, c’est le nom d’une des maniéres qu’a trouvées l’homme pour lier son bref passage terrestre avec le temps presque infini de la terre et du cosmos.
Nul mieux que Cézanne dans ses conversations avec Gasquet n’a donné une description aussi juste de ce moment ou le peintre et le monde entrent en résonance et de la maniére don’t l’art constitue le moyen, et pour un artiste, le seul, de sortir vivant et radieux de cette singuliére et dangereuse lutte avec et contre cette potentielle fusion.
≪Pour bien peindre un paysage, je dois découvrir d’abord les assisees géologiques. Songez que l’histoire du monde date du jour où deux atomes se sont rencontrés, ou deux tourbillons, deux danses chimiques se sont combinées. Ces grands arcs-en-ciel, ces prismes consmiques, cette aube de nous-mêmes au-dessus du néant, je les vois monter.../... À ce moment-là, je ne fais plus qu’un avec mon tableau. Nous sommes un chaos irisé.../... Le soleil me pénètre sourdement, comme un ami lointain qui rèchauffe ma paresse, la fèconde. Nous germinons. Il me semble, lorsque la nuit redescend, que je ne peindrai et que je n’ai jamais peint.../... Un beau matin, le lendemain, lentement les bases gèologiques m’apparaissent, des couches s’établissent, les grands plans de ma toile, j’en dessine mentalement le squelette pierreux. Je vois affleurer les roches sous l‘eau, peser le ciel. Tout tombe d’aplomb. Une pale palpitation enveloppe les aspects linéaires. Les terres rouges sortent d’un abime .../... Le génie serait d’immobiliser cette ascension dans une minute d’équilibre, en suggérant quand meme son élan. Je veux m’emparer de cette idée, de ce jet d’émotion, de cette fumée d’etre au-dessus de l’universel brasier.≫ (Conversations avec Cézanne, Ed Macula)
Comment ne pas comprendre en regardant les paysages de KWUN SUN-CHEOL qu’il a non seulement compris la leçon de Cézanne, mais qu’il poursuit cette interrogation qui conduit l’homme à chercher dans la terre même, le principe de sa force. Il a senti que chaque montagne est un monument et qu’en elle il y a um os qui est ce qui lui permet de tenir. C’est un rêve inventé par l’homme mais si vrai et que Cézanne aussi avait vu.
Car KWUN SUN-CHEOL le sait, l’enjeu de toute toile c’est qu’elle 《tienne》, ce qui veut dire que le peintre ait su, par ses pinceaux, nous faire accèder au mystére de la creation.
2 Le visage, cette cathedrale
La force de l’oeuvre de KWUN SUN-CHEOL vient de ce qu’il a su comme pratiquement aucun peintre, regarder non seulement la chair, et le corps mais surtout sur les visages humains avec le même regard que celui qu’il porte sur la montagne. Dessinateur hors pair, il n’a jamais cherché la ressemblance, mais il est parti de la ressemblance pour conduire ses pinceaux à devenir le révélateur de forces et de mouvements que l’on cherche en général à cacher lorsqu’il s’agit du visage.
C’est sans doute pourquoi il a peint le plus souvent des gens âgés et marques par la vie. En effet, aucun autre type de visage ne sait laisser affleurer la violence que la vie et le temps font subir à la chair des hommes. Pourtant, c’est autre chose qu’il cherche à montrer. Chaque visage peint par KWUN SUN-CHEOL est bien celui de quelqu’un, quelqu’un qu’il a connu ou rencontré, ou pu observer ici où là. En le peignant, il ne lui enlàve pas son identité. Bien au contraire! Mais il réussit ce tour de force pictural de faire rayonner cette identite à partir du fond magmatique de l’homme, de fait qu’en lui comme dans les montagnes vibre et s’agite des forces chaotiques, des laves sombres, des terres arides.
Chaque visage devient une tête sous le pinceau de KWUN SUN-CHEOL ou pus exactement chaque tête toujours montrée sans etre reliée à un corps semble tellement avoir fait monter en elle tout ce qui fait la chair, qu’elle existe à la fois comme une planète et comme une cathédrale.
Ce que réussit à faire KWUN SUN-CHEOL c’est à montrer que chaque individu porte finalement en lui, comme inscrit à même les traits de son propre visage, ceux d’un christ de douleur. C’est pourquoi lorsqu’il s’est parfois risqué à peindre cette figure emblématique, il a su le faire au-delà de tout dogmatisme religieux, avec une rare force.
Déliée de tout contexte chaque visage, chaque tête est comme une île, un coninent, un abri torturé mais immense, une sorte de caverne improbable dans laquelle serait concentrée tout le drame de l’humanité.
Qu’est une église, une cathédrale, sinon le lieu à la fois semblable à tant d’autres et absolument unique dans lequel peut être accueillie la douleur d’exister et la nécessité de vivire? C’est porté par ce sens profond de l’humain que KWUN SUN-CHEOL a peint sa vie durant.
Ce qui le meut lorsqu’il installe ensemble des dizaines de grands dessins l’encre de chine, c’est alors véritablement de montrer non plus seulement le travail du temps long mais celui de l’histoire récente, la manière dont elle vient s’inscrire dans les traits individuels et la manière surtout dont chacun résiste a cette dissolution de ses formes propres pour affirmer, malgré toute la violence de l’histoire, son individualité.
C’est ce paradoxe que KWUN SUN-CHEOL a compris mieux que tant d’autres, cet écart incommensurable entre les forces de destructions et celles qui dans la vie nous conduisent à nous reconstruire chaque jour et que pourtant chaque jour nous réussissons à combler.
3 Lâme, os de l’invisible
Ce que son travail inlassable sur la chair, celle des hommes celle de la terre, l’a conduit à comprendre et à identifier, c’est qu’il y a en chacun une force, unique, qui vit en lui et lui permer de tenir, même s’il ne sait pas la nommer.
Les oeuvres les plus abstraites de KWUN SUN-CHEOL ont le plus souvent pour titre le mot âme et cette âme n’est pas le principe abstrait ou la dimension immatérielle à laquelle on se réfere au moyen de notre raison, mais bien plutôr, c’est en tout cas le message central de la peinture et de celle de KWUN SUN-CHEOL en particulier, un os dans la chair du temps.
Car c’est le temps que peint KWUN SUN-CHEOL, si l’on peut dire qu’il est possible de le peindre et c’est cette chair invisible qui nous constitue, dans laquelle nous vivons et par laquelle nous mourons qui est le sujet de ses oeuvers.
C’est en tout cas ce que révèlent les tableaux qui portent le mot 《âme》 dans leur titre, la présence non pas de quelque chose d’invisible qui hanterait le vivant comme son ombre, mais bien la présence d’un os dans ce flux invisible qu’est le temps. C’esten venant se frotter à cette résistance intime et interne que le temps dévient perceptible.
C’est aussi du limon que le temps depose en chacun de nous que nous sommes constitués. KWUN SUN-CHEOL émet cette hypothèse fondamentale, une hypothèse de peintre, que cette force unique de résistance est ce qui permet de 《voir》 le temps, ou du moins de le rendre visible. Et cette force ne peut être montrée que comme matière et comme transitoire, comme résistance et comme flux. Ces tableaux dans lesquels il n’y plus rien à voir, ni visage, ni montagne, sont en fait ceux dans lesquels KWUN SUN-CHEOL s’avance le plus près de ce qui dans le visage et dans les montagnes fait que l’un ou l’autre tiennent, à la fois dans la réalité et dans le tableau.
C’est ce que pour lui Francis Bacon ou Lucian Freud ont mis de côté, cette traque par la peinture de la vérité de la chair à travers la saisie de la matérialisation de l’impossible, à travers la mise en peinture de ce réel dont nous connaissons l’existence et auquel pourtant nous refusons souvent de rendre la place qui lui est due, i’âme.
Qu’est-ce que l’âme ? c’est que qui dans la chair résiste à la dissolution de la chair et ce qui dans le temps résiste au passage du temps. C’est l’endroit, à jamais réel et à jamais insaisissable où deux vagues opposée se rencontrerient. La force des oeuvres de KWUN SUN-CHEOL c’est précisement de réussir a donner une existence visible à ce moment de la rencontre entre la vague mantante du vivant te la vague du temps qui reflue.
Ces tableaux sont le plus souvent abstraits, mais on perçoit à les regarder avec attention que la chair n’est pas loin et que l’espoir n’est pas vain de reussir a vaincre les forces de dissolutions a l’oeuvre dans la vie mais qui s’opposent à la vie.
Alors devant ces toiles, on pense à Eugene Leroy, mais surtout à Fautrier qui a su, dans sa série des otages en particulier, rendre compte de cette tension interne à la vie, à l’homme.
Au-delà de la violence contenue dans ses images abstraites mais qui précisément conferent à l’âme une dimension matérielle efficace, c’est à penser une spiritualité ouverte que nous conduit KWUN SUN-CHEOL. Il partage avec le Bouddhisme la part haute de sa philosophie et avec le christianisme l’amour de l’humanité et il sait que le plus souvent, ce sont par les blessures que nous accedons à cette âme, comme y accèdent tous les Coréens lorsqu’ils pensent à cette blessure dans le paysage qui est aussi une entaille dans leur chair et la forme de l’ame qui les sépare et pourtant les relie entre eux, encore et toujours